4) 에베소서 4장 22-24절 :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서의 성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구절은 성화 교리를 말하는데 가장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사실, 에베소서에서는 이 구절에서만 아니라 더욱 많은 구절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에베소서 4장에서 5장에 이르는 많은 분량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자랄 것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을 말하는 성화를 언급하여 주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에베소서 4장 13-16절에서 성화를 말한다고 본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앞 절과의 연관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가 된 한몸의 지체들로서 이들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스도로 완전히 충만한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게 이들 모두에게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통해서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기 다른 지체를 도움으로 온몸이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할 것을 이야기 한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인 것을 말하면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바울의 이 권면은 지금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인데, 이 하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는 능력(은사)이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엡3:20-21). 그리스도와 하나된 몸인 교회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러 모은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이 몸으로 온전히 하나 되게 성령께서 힘쓰신다. 여기서 이것을 가지고 교회의 자라감, 곧 교회의 성숙을 말할 때에도 한 개인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서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성화 개념이 아닌,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에 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연결하여 위로 쌓아져 올라감으로써 온전한 집의 모양을 드러내듯이, 또는 모자이크 된 종이 하나하나가 맞추어져서 온전한 그림의 모양을 드러내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그리스도의 한몸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해를 가진다면 본 구절은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할 것에 대한 어떤 가르침도 없다.
이제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구절을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삼는 자들은 이것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성화를 말해준다고 한다.
여기서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에서인가? 그것은 앞 절인 17-21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말하였다(골3:2-3).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닫혀 있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악한 죄에 내맡기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사는 생활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음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그와 같이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만일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을 배웠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그 믿음에 있다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진리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는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좇아서 우리의 낡고 악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의 생활 방식, 곧 거짓된 욕망으로 부패해 가는 (악한 인간성의)옛사람’(현대인의성경),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공동번역성경), ‘지난 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표준새번역성경)이 우리의 모습이다. 만일에 이런 모습에 여전히 머물러 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의 가르침에 위배되게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태도와 생각을 뽑아 버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그 존재성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는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야 할 삶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진 마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반응으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몸된 성격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교회에 다양한 은사의 나타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에 머물러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우리의 옛사람의 욕망으로 거스르지 말라는, 그래서 성령의 일하심을 훼방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옛사람의 벗어버림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생각한다고 해서 되어지고,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들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의 사상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에 의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 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에 연합된 몸으로서 죄의 몸이 완전한 구속, 곧 부활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의 죽음은 어떤 한 순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옛사람의 죄성이 발동될 때마다 옛사람은 죽고 대신에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서는 산 자인 새사람이 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옛사람을 날마다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지, 옛사람이 죽은 새사람이기 때문에 새사람에 합당한 생활을 사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서만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없어야 하며, 또한 더 이상의 새사람을 입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날마다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을 날마다 죽게 하시며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의 성취를 날마다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에서 보는 것이다.1) 이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 우리, 곧 그리스도와 한몸인 교회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에베소서의 여느 구절이 그렇듯이 성화를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 아니다. 날마다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날마다 새사람에 대해서는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서는 성화된 것이 없으며 또한 성화되어가는 것도 없다. 다만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죄의 사람인 자신을 보는 것이며, 그런 죄인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을 사는 법칙을 배워 앎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온전함에 있지 못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용납하시고 용서를 베푸심으로 새사람을 이루게 하신다.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옛사람의 악한 욕망이 분출되는 모든 것에서 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새사람의 입음이 실현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한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써의 성화적 사건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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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Anthony A. Hoekema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속에 죄가 계속 현존하기 때문에 신자의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이어야 한다”면서 옛사람이 주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새생명 가운데서의 성장을 포함한 점진적인 성화”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견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된 것이 말하는 십자가의 공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성도는 오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그만큼 새사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 그래서 그가 새사람이 된 것만큼 새사람의 성품이 발휘되는 것이 아닌, 여전히 새사람이 되는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옛사람의 악한 죄성을 지닌 것이다. 성도가 새사람인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연합한 자를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 속에 두고서 옛사람이 발휘되는 그를 새사람으로 다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신 후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죄 사함과 의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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