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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연인

카이로스3 2014. 4. 12. 08:17



Piano Quartet No.2 in A major, Op.26

브람스 / 피아노 사중주 2번
ohannes Brahms 1833 - 1897

Clifford Curzon, Piano /
Budapest String Quartet



이런 곡을 만들면서 브람스는
양원한 그의 연인
클라라를 그리워했을까요...




2악장 Poco adagioClifford Curzon, PianoBudapest String Quartet, 1952 mono

 

     클라라 슈만                                     브람스 --(출처--다음 블로그--찻잔 속에 남은 향기)

 

 

[브람스의 작품관]

형식,균형,節度(절도)를 고수한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
브람스가 균형과 절도라는 고전주의자적 원리의 부활에

깊은 관심을 보내고 있음은 그의 창작 활동에서 볼 수 있다.

바그너와 리스트를 대표하는 표제음악 원리라든가 한 악극은

브람스의 창조적 입장이나 기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브람스는 고전주의의 원리를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부분 음악에는 명백히 낭만주의적 색조가 우세하다.

브람스에 있어서 고전성과 낭만성의 대립이라는

이원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람스의 양식은 베토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악 작품에서 브람스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광대한 음공간에서

펼쳐지는 보편적 기분이나 정서를 즐겨 표현했다.

브람스의 대규모 형식에서 보여지는 명확한 클라이맥스와 긴장의 해결은

베토벤 의 다이내믹한 전개 원리와 매우 공통적으로 보여진다.

 

낭만주의적 기질은 단조의 사용이라든가,

그의 「교향곡 3번 바장조」첫 머리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옥타브에 걸친 폭넓은 멜로디, 저음악기를 강조하는 관현악법에서 

생기는 어두운 색조 등에서 인지할 수 있다.

 


브람스는 고전주의자로서 형식과 균형과 절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나, 리스트의 「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은,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기분의 요동과 괴상하고

색다른 표현은 브람스 작품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절도있는 운동과 힘, 전체적인 평정성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의 고전주의적 특징은 소나타 형식의 사용인데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 구성이 고전적인 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하이든이나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브람스도 교향곡에서

 2관 편성의 목관악기, 표준적인 금관악기, 팀파니, 통상의 현악기군에 의한

 관례적이거나 혹은 고전적인 악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브람스는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바그너에게서 색채가 풍부라고

기교를 부린 진보적인 관현악 수법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전통적인 관현악법에 따랐다.

 

그러나 주제를 갖가지 악기에 분재하여

(주제 소재의 대부분을 한 종류의 악기나 악기군에 할당하는 것과는 반대로

패치워크중의 관현악법을 만들어 내는 기법은 분명 브람스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브람스는 기존형식 가운데서 변주곡을 가장 좋아했다.

변주곡이 자신의 음악적 사고를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런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주제와 변주란 형식만이 제한된 화성 및 선율의 틀 안에서

작곡가로 하여금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감을

독립된 한 작품 내에서 나타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변주곡 형식은 주로 피아노 곡에서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피아노 양식은 쇼팽의 우아함도,

리스트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웅변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모델은 슈만과 베토벤으로, 그 특징들은 음향의 충실함,

 분산화음 음형, 옥타브나 3도, 6도에 의한 선율선의 중복 사용

그리고 당김음, 홀리 리듬 및 기타 이와 유사한 리듬 변형 수법이 많이 사용되는 점이다.

 

그것은 낭만주의가 풍부한 화성과 따뜻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 언어는 본질적으로 낭만적이기 보다는

고전적인 기본 관념으로 구축된 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의 많은 작곡가들이

다양한 어법으로 작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 특유의 음악적 특징, 즉  음울하고 조심스럽고

엄숙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개성은

예술가곡,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 등

그가 작곡한 거의 모든 작품에 새겨져 있다.

 이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는 다행히도

낭만주의적 19세기에 태어난 음악구성의 노련한 장인이었다.

그는 언뜻 상반되게 보이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속성을

 자기 음악 가운데 솜씨있게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독일 낭만주의의 호화 찬란한 색채로 치장된

고전주의적 형식이라는 훌륭한 혼합은 탄생시켰다.

1892년에 브람스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 Op. 116부터 Op. 119까지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몇 개의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깊은 음악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1895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의미 깊은 해이었다.

이 해에는 빈에서 브람스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브람스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브람스의 활동 범위와 작품]

브람스의 창작 제 1기
 1850년대부터 시작되는 브람스의 창작 제1기는 주로 실내악 창작을 비롯,

1854년부터 1894년까지 40여 년간에 걸쳐 24곡의 작품 을 완성하였다.
그 속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현악기 또는 현악기와 피아노의 조합을 위한 갖가지 4중주곡 및 5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
실내음악 양식은 많은 낭만파 작곡가들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독주 피아노 곡이나 리트가 갖는 개인적 표현의 결핍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관현악 음악의 다채로운 색채와 압도적인 음향을 갖지도 못한 데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골수 낭만주의자들이었던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바그너가 실내음악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19세기 이 매체에 의한 최선의 작품들이 고전적 전통에

가장 가까웠던 작곡가들 즉,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를 조명해 볼 때

전 생애를 통해 실내악 표현양식에 열심히 도전한 브람스는

교향곡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19세기 실내악 작곡가 중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브람스의 합창곡 시대 

1860∼1870년은 브람스의 합창곡 시대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몇몇 합창곡 중에서 유명한 「독일 레퀴엠」, 「혼성 4중창」,

그리고 「네 손 피아노를 위한 사랑의 노래」, 「왈츠집」이 작곡되었다.

2백60여곡의 가곡은 그의 실내악과 같이 40여년간에 걸쳐 작곡된 것인데

전반적으로 슈베르트를 모범으로 하고 있으면서 피아노 성부의 역할을

부차적으로 한정시킨 점은 슈베르트나 슈만의 가곡과는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피아노 반주와 비교해 볼 때

브람스의 반주는 덜 회화적이고 묘사적이다.

슈만의 가곡에서와 같은 긴 전주 , 후주등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브람스의 가곡은 슈만의 가곡처럼 열렬히 끓어오르며

충동적인 성격보다는 과묵하고 고전적 깊이를 보이며

내성적이고 체념한 듯한 우수를 나타낸다.

오히려 브람스의 낭만주의적 특성은 연애의 주제와

감상적인 분위기에 찬 가사의 선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가 즐겨 선택한 시의 주제는 죽음에 관한 명상으로

「광야의 고독」, 「나는 점점 더 고요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가네」,

「교회의 마당에서」, 「죽음, 그 차디찬 밤 작품 121」(1896)등과

성경 가사에다 노래를 붙인 「네 개의 엄숙한 노래」등은

예술 가곡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준다.


말년의 브람스가 지닌 창조력의 대부분은 관현악 어법에 주입되었다.

유명한 작품으로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

비극적 서곡」, 「대학 축전 서곡」이 있다.

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기교적인 이중 협주곡」과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교향곡들은 가곡, 실내악, 합창곡등을 통하여

상당히 인정을 받고 난 후의 말년에 쓰여진 곡들로

「교향곡 제1번 다단조」는 그의 나이 43세(1876)때의 작품이며,

최후의 「교향곡 제4번 마단조」는 그의 나이 52세(1885 )때 작곡한 것이다.
바그너와 리스트의 낭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이 교향곡들은 베토벤의 형식을 게승한 것으로,

19세기 후반의 고전 복구 운동이 압축되어 있다.

 

고전적 형식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전종적인 4악장 형식에

고전적 기교인 대위법과 동기적 발전이 있다. 또한 특정한 표제가 없다.

이것은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절대음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교향곡들은 그 화성적 어법, 충실하고

다채로운 관현악 음향, 기타 그 음악어법의 일반적인 특징에서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의 함정들, 즉 거짓된 웅변, 허황한 기교의 과시 그리고,

작곡가의 머리 속에서 아무런 맥락없이 연결된 생각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음악의 무형식성들을 피하였다.

(출처-- http://home.nownuri.net/%7E365smile/brahms_historical.)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

브람스는 초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그와 함께 몇 년간의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이 때에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훗날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브람스를 가리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 이라고 까지 격찬했지요.

스무 살의 음악도에 지나지 않는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슈만은 즉시 그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어

청년 브람스가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브람스는 슈만과 교류하면서 자연히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과의 정도 깊어갔는데,

그녀는 당시 한창 명성을 얻고 있는 뛰어난 여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당시 클라라 슈만은 34살의 나이로 피아니스트로서는

물론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정점에 이르러 있을 때였습니다.

청년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 대신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요.

 

브람스는 억제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고통으로 다스리면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작곡하여 클라라 슈만에게 헌정했습니다.

또 창작에만 정열을 쏟음으로써 그녀를 잊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한 브람스의 노력은 빛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씩 그녀를 잊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게 되는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1853년, 정신병이 악화된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만사를 제쳐놓고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슈만은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병이 깊어져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위로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요.

그래서 그녀를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작품9)>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클라라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클라라 슈만에 대한 브람스의 사랑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클라라로서는 그런 브람스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브람스에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성애적인 우정만을 줄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럴수록 브람스의 가슴의 상처는 더욱 크고 깊어지기만 했지요.

브람스에게 있어서 클라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여인이면서

또한 은인인 슈만의 부인이었습니다.

때문에 브람스는 그녀에게 향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과

슈만에 대한 존경심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브람스는 당시 착상한 아주 광포한 곡인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했습니다.

"자, 권총으로 자기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달리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그 남자를 상상해 보란 말이야."

마치 젊은 베르테르가 롯데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여

자살을 결심하게 될 때와 같은 비장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무렵에 슈만이 죽었습니다.

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에 대한 양육 때문에 경제적인 고통을 겪었고,

 브람스는 그들을 돌보아 주는 걸로 자신의 숙명적인 사랑을 대신했습니다.


버릴 수 없는 그런 삶의 짐과 사랑의 고통 속에서 문득

브람스의 가슴속에 떠오르는 악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레퀴엠’ 이라고 불리는

<Ein deutsches Requiem(German Requiem), Op. 45> 가 그것이었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쓰면서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 라고 했습니다.

곧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 는 말이었지요.

이 곡이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고뇌를 나타내고 있으며,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달래는 곡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브람스의 그런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더욱 깊이 있는 사랑으로 변해갔고,

뜨거운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습니다.

클라라 슈만에 대한 짝사랑은 그의 음악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브람스가 거의 대부분의 음악적 영감을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클라라 슈만을 만난 그 순간이 바로 예술가로서

새롭게 태어난 계기가 된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0살에 그녀를 만나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지요.

브람스의 영원한 연인 클라라는 1895년 가을 뇌졸중으로 쓰려졌습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nge, Op.121)>를 쓰기 시작하였지요.

브람스는 이 네 곡에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통해

느낀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을 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곡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을 담은 곡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지요.

클라라가 1896년 5월 20일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 고 비통해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3일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와 같이 브람스의 평생을 통한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는

 그의 음악 못지않게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