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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나무위키 백과

카이로스3 2023. 3. 6. 13:15
1. 개요2. 역사
2.1. 개요: 통합 적통론2.2. 구한말 선교 ~ 일제강점기2.3. 광복 이후
2.3.1. 고신의 이탈2.3.2. 기장의 분립2.3.3. 합동과 결별
3. 조직
3.1. 역대 총회3.2. 노회 목록3.3. 소속 교회3.4. 전국 분포3.5. 산하 학교3.6. 이사, 교목 파송 대학교3.7. 소속 교회가 설립한 학교
4. 특징5. 이야깃거리
5.1. 가톨릭에 대한 입장
6. 사건 사고
6.1.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이단 사면 취소 사태6.2. 광주 안디옥교회 방역 조치 비협조6.3. 장로회신학대학교 무지개기 사건6.4.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
7. 파생 교단8. 분열된 교단
8.1. 최종 분열 당시의 교단들

1. 개요[편집]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884년 설립된 조선장로교공의회를 모태로 하는 대한민국 장로회 양대 교단 중 하나이자 한국 개신교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가장 교세가 큰 교단이기도 하다.[6]

예장통합은 합동·고신 그리고 기장과 같은 '조선장로교'로서의 뿌리를 가지며, 조선장로교는 감리회와 함께 구한말 한국에 최초로 선교된 개신교이다. 조선장로교공의회에서 각 교단이 분리된 과정은 대한민국의 장로회 교단 분열사 참조.

단, '분열사'라는 항목명은 본 문서에서 서술하는 예장통합이나 기장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예장통합은, 합동과 갈라진 이후로는 단 한 차례도 분열하지 않았다.[7]

약칭은 예장통합이며 일반적으로 (신학적) 중도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중도 성향이라는 것은 기계적, 산술적 의미의 중립이 아니라 같은 교단 내에서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포용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8]

2. 역사[편집]

2.1. 개요: 통합 적통론[편집]

본 섹션의 역사는 예장통합을 기준점에 놓고 서술한다. 즉 예장통합을 중심에 놓고 한국 장로회 분열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예장통합 교단사의 요지는, 언더우드의 선교 이후 예장통합이 적통을 이어가고, 기장과 합동 등이 이 적통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장통합의 교단사는 타 장로회 교단, 특히 예장합동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9]

예장통합의 역사관은 개별교단의 입장을 차치하고도 에큐메니컬적인 측면에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선교된 교회, 그리고 세계 장로교/개신교의 일부로서 정체성을 가장 충실히 지키는 교단이 예장통합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10] 둘째,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구한말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장로회 유산을 대부분 예장통합이 관리하고 있다. 우선,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설립된 미션스쿨이나 기타 장로교 기관들이 대부분 예장통합 관리 하에 있다.[11] 또한 구한말 장로회 선교사 새뮤얼 모펫과 호러스 언더우드의 추모와 묘역관리도 예장통합이 한다.[12]

이와 같이 한반도 장로회 선교 역사의 유형적 무형적 상징을 대부분 예장통합이 관리하므로 통합을 장로교의 적통을 통합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예장통합은 국내 그리고 세계적으로 장로교 대표 교단으로서의 위상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장은 한국 국내 교계에서는 장로교의 대표격으로서 타 교단 및 가톨릭과 대화에 참여하고, 세계적으로도 장로교/개혁교회 연합체인 WCRC의 일원으로서 세계 장로교, 그리고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과 대화한다.

예장통합의 교단사 서술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은 1940년대 초중반에 했던 친일활동을 축소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애써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이미 존재하는 역사를 없는 셈 치는 것 또한 올바르진 않다.

예장통합의 공식적인 입장은 당시 교단 지도부 차원에서 친일활동을 하였고, 그 교단지도부의 적통은 기장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 중립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예장통합이 주장하는 적통론과 상충한다.

2.2. 구한말 선교 ~ 일제강점기[편집]

대한민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시작되었다. 선교 이후 조선인 자립교단으로 조선장로교공의회가 설립되었다. 공의회는 독노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1912년에 목사 96명과 장로 125명이 총대로 모여 첫 총회를 치르었다.

이후 빠르게 교세를 확장하여 1930년대 무렵에는 조선 내 최대인원 종파가 되었는데, 일본이 종교를 탄압하고 노골적으로 천황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때도 그 즈음이었다. 국가신토와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종교인, 비종교인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은 모조리 신사 참배를 강요받았는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본과 결탁하여 이런 행위에 적극 찬동했다. 신도들에게 사실상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천황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면 교단에서 축출하기까지 했다.

2.3. 광복 이후[편집]

2.3.1. 고신의 이탈[편집]

1949년 총회 명칭을 현재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하였다. 교단 성립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교단에서 축출 및 투옥된 목회자들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독일 개신교가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나치협력 목회자들과의 대통합을 실시하고 하나의 교회로 다시 태어난 일에 비견할 만하다.

친일행위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다가 강제탈퇴를 당한 신도들은 '우상숭배 거부'라는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다 정치와 결탁한 지도부에게 쫓겨났기에, 이들에게 친일 문제를 공개적으로 회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친일행위와 천황숭배라는 부끄러운 역사로 얼룩진 당시 장로회 지도부는 반성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 장로들과 목사들 손으로 대표로 선출된 교단지도부를 저항파 목사들이 불신임하는 상황이 초래되었고, 급기야 1951년 총회에서 이 문제로 갈등이 터져나왔다.

결국 지도부는 강제 탈퇴 신도들과 합의를 거부하고 이들을 모조리 제명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최종적으로 1952년 제 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경남노회)는 총회와 하등 관련이 없는 집단이라는 언명과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을 계기로 고신파와 기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완전히 결별했다.

예장통합은 고신과 교단 차원으로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예장통합과 예장합동 계통의 교회들은 지금도 한국 정치권과 유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고신은 자신의 정통성을 국가신토를 거부하다 친일 장로회 지도부에게 강제로 탈퇴당한 신도들에게서 찾기 때문에 친일 정치권 세력과 결탁하는 일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한편 교단 지도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났던 독일 개신교에 비한다면, 당시 교단 지도부가 회개 없이 신사참배 결의 취소로 책임을 피하려 했고 이후 고려신학교를 폐쇄하는 등의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고[13], 출옥성도 중 온건파[14]인 혁신복구파[15]조차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내려와 합류했으나 존중받지 못한 점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2.3.2. 기장의 분립[편집]

1953년,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수용할지를 둘러싼 문제로 기장 측의 김재준 목사가 총회에서 파문당했다. 이에 따라 김재준 목사[16]를 따르는 목회자 일부가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분립하여 나갔다.

이 사건으로 구한말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던 해외의 장로교회 교단 중 캐나다 연합교회[17]가 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18]

21세기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예장 통합 신학교 커리큘럼에서도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므로 이때의 갈등과 분열은 오늘날에 회복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기장과 통합 사이에는 현재 단발적 대화가 이루어지고, NCCK나 에큐메니컬 운동 등에서 협력한다. 2016년에는 김재준 목사의 파면을 취소하는 교단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장 통합 입장에서 신학적 화해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장의 신학은 민중신학의 형성, 해방신학이나 북한관 등의 문제로 온건한 장로교 신학에서부터 멀어진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9]

2.3.3. 합동과 결별[편집]

1960년 연동교회에 모인 찬성파, 이른바 연동측은 대한기독교장로회 일부 온건파를 흡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을, 승동교회에 모인 반대파, 이른바 승동측은 1951년 독립해 나갔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과 합동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을 결성, 분립하였다.

합동측과 분열 당시 평안북도 출신들이 주로 통합 측에 가담하였다. 1967년에는 성결교회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던 목사들이 1952년에 설립한 임마누엘 예수교 소속의 대다수 교회들을 흡수하였다.[20] 자세한 내용은 한국 장로회 분열사 문서 참고.

3. 조직[편집]

2021년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통계
구분
내용
노회
69개
교회
9,421개
교역자
목사
21,423명
전도사
2,420명
교육전도사
3,288명
총계
27,131명
교인
33,626명
안수집사
80,273명
권사
190,590명
서리집사
561,899명
세례교인
1,617,335명
전체교인
2,358,914명[21]
제106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조직
자문 위원회
총회장
임원회 사무총장
상임부
국내선교부
군경교정선거부
세계선교부
교육자원부
신학교육부
사회봉사부
농어촌선교부
정치부
규칙부
재정부
재판국
상임위원회
고시위원회
평신도위원회
훈련원운영위원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
감사위원회
헌법위원회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정기위원회
통계위원회
공천위원회
절차위원회
안내위원회
질서관리위원회
총대등록심사위원회
헌의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특별위원회
총회 5개 처
국내와군·특수선교처
해외·다문화선교처
교육·훈련처
도농·사회처
행정·재무처

3.1. 역대 총회[편집]

3.2. 노회 목록[편집]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노회 현황 (가나다순)
강원 노회
강원동 노회
경기 노회
경남 노회
경동 노회
경북 노회
경서 노회
경안 노회
광주 노회
광주동 노회
군산 노회
김제 노회
남원 노회
대구동 노회
대구동남 노회
대구서남 노회
대전 노회
대전서 노회
땅끝 노회[22]
목포 노회
부산 노회
부산남 노회
부산동 노회
부천 노회
서울 노회
서울강남 노회
서울강동 노회
서울강북 노회
서울강서 노회
서울관악 노회
서울남 노회
서울동 노회
서울동남 노회
서울동북 노회
서울북 노회
서울서 노회
서울서남 노회
서울서북 노회
순서 노회[23]
순천 노회
순천남 노회
안양 노회
여수 노회[24]
영등포 노회
영주 노회
용천 노회
울산 노회
익산 노회
인천 노회
인천동 노회
전남 노회
전북 노회
전북동 노회
전서 노회
전주 노회
제주 노회
진주 노회
진주남 노회
천안아산 노회
충남 노회
충북 노회
충주 노회
충청 노회
평남 노회
평북 노회
평양 노회
포항 노회
포항남 노회
함해 노회

3.3. 소속 교회[편집]

3.4. 전국 분포[편집]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수도권[29], 호남권, 경상북도 북부 내륙 지역[30]  동해안 지역[31], 충청북도 남부[32], 제주 지역에 상대적으로 교세가 크며 대전을 제외한 충남권[33][34]  강원도[35][36], 경상남도 동부 지역[37]은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한 편이다.

3.5. 산하 학교[편집]

국내 개신교단 중에서 가장 미션스쿨이 많다. 그리고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모두 신학대학으로 승급시킨 유일한 교단이다. 게다가 통합 소속이 아니더라도 평택대학교와 같은 다른 장로회 교단의 미션스쿨이나 부산외국어대학교, 아신대학교, 한동대학교 등 초교파 성향 미션스쿨의 설립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션스쿨을 많이 설립한 만큼 계명대학교, 예수대학교 등 미션스쿨 경영권 분쟁이나 교단 탈주[38] 같은 아픈 기억도 많아서 요즘은 시큰둥한 편이다. 서해대학도 폐교하기 전에 한일장신대학교와 통합을 시도하다가 안 되자 그냥 포기해버렸을 정도.

3.6. 이사, 교목 파송 대학교[편집]

3.7. 소속 교회가 설립한 학교[편집]

예장 통합 소속 교회에게 설립되었지만 예장 통합과 분리되어 있는 학교이다.
  • 신학대학교
  • 종합대학
    • 경성대학교 - 김길창 목사(당시 부산 향서교회 담임목사)가 설립: 김길창 목사는 경성대학교의 전신인 경남사범대숙을 1955년 설립했다. 1963년 통합과 합동이 분열할 때, 김길창 목사는 합동으로 소속을 변경했지만 부산 향서교회는 통합에 잔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길창 목사는 1966년 소천할 때까지 부산 향서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역사 때문인지 형제학교였던 부산신학교가 합동과 인준하여 확실한 보수 성향을 띄었지만, 경성대는 어차피 신학대도 없었기에 교단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1998년 부산신학교를 흡수하여 신학대학을 신설하자 합동과의 인준 관계를 끊어버렸고, 2021년 학부 신학대학을 폐과해버렸다.

4. 특징[편집]

  • 예장합동, 기장과 함께 대한민국 장로회 교단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41] 실제로 1884년에 공식적인 장로교 선교가 알렌 선교사를 통해 시작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시초가 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단 중 교인 수가 가장 많은 교단이며, 대한민국 장로회의 모교단이라고 할 수 있다.[42][43]
  • 개혁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연합을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44]
  •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을 옛 문서화하고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문답만을 사용한다.[45]
  • 한국기독교장로회만큼은 아니지만 성서비평학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46]
  • WCC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한다.[47]
  • 장로회 교단답게 장로 정치 체제를 취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창립 회원 교단이며, 수년 전에는 한기총에 가입하였으나 한기총의 파행으로 한기총을 탈퇴하고 현재는 한국교회연합 한국교회총연합회에도 가입해있다.[48]

5. 이야깃거리[편집]

  • WCC, CCA, NCCK에 가입된 교단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한다. 2013년 WCC 부산총회 유치를 위해 가장 많은 지원을 하는 등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49]
  • 교인, 목회자 개개인들의 성향 스펙트럼은 넓은 편으로, 진보적인 성향부터 보수적인 성향까지 다양한 성향의 교인들이 존재한다.[50] 신학적으로 신정통주의를 중심점으로 해서 자유주의 성향, 복음주의 성향 교회 모두 있으나, 진보적인 교회보다는 복음주의적인 교회가 훨씬 많다.[51] 신학적으로 중도 보수 정도. 이 때문에 일부 인사들로부터 '진보와 보수에 양다리를 걸치는' 교단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나,[52] 진보와 보수를 모두 포용하는 교단의 특성상 한국 개신교 내에서 진보 교단과 보수 교단 사이에 의견이 대립할 때 중재자로서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53]
  • 예배 전통을 비교적 철저히 지키는 교단으로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강단에 십자가를 걸고 있으며,[54] 강단보와 성찬대를 갖추고 있다. 또한 성공회 정도는 아니지만 개신교 내에서는 주일 대예배시 찬송가 반주로 오르간을 사용하는 교회의 비율이 높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예복(가운)과 스톨을 착용하며 영락교회, 주안장로교회 등 일부 교회에서는 클러지 칼라(또는 목회자 셔츠. 로만칼라를 개량한 와이셔츠)를 착용하기도 한다.[55]
  •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교단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편이며,[56] 사회복지기관 위탁운영, 미션스쿨 설립 및 운영[57], 생태·환경운동, 인권운동, 기타 사회운동 등 사회선교에도 가장 적극적이다. 기독교 좌파로 이름 있는 진보적 인사들도 없지는 않는 편.[58]
  • 2003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산하 신학교인 평양신학원 건물 건축을 지원하여 완공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전까지 운영 자금도 지원했으며 총회나 노회 임원이 여름방학마다 계절학기 강의 형식으로 평양신학원에서 특강을 했다.
  • 소속 교회 중 가장 신도 수가 많은 교회는 명성교회다.[59]
  • 한국에서 마술을 공식적으로 사용금지한 유일한 개신교 교단이다(...) 옛날에 의결한 것이 아니라 무려 2017년에 의결했다. 다만 성경에서 마술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60] 하지만 현대에는 오컬트와 마술이 분리된 특성상 현대 교회에서는 사역자가 마술을 시전하거나 마술사 신자의 재능 기부를 교회 수련회에서 사용하며[61], 흑마술은 비난해도 일반 마술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을 아끼려는 모습이 대부분이라서 중도 성향이 강한 통합에서 마술 금지를 의결한 것이 꽤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인 마술사들은 예장 통합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62] 다만, 마술을 금지했다고 해서 해리 포터와 같은 작품을 보지 말라고 하진 않고 또 교인들도 마술쇼 같은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술을 금지했다는 사실도 모른다.

5.1. 가톨릭에 대한 입장[편집]

교리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무조건 배척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 예장통합은 가톨릭에 대해 "로마교회가 이단적인 요소는 있으나 반사회적이라거나 반윤리적인 다른 이단집단과 같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장로회)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정리하자면, 예장합동, 침례회 등 비에큐메니컬 보수 교단과 다르게 가톨릭을 이단 내지 이단에 준하는 것으로 단정짓지 않지만, 보수적 에큐메니컬 개신교 교단 답게 가톨릭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6. 사건 사고[편집]

예장통합의 사건 사고를 서술.

6.1.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이단 사면 취소 사태[편집]

- 과거 이단으로 규정된 몇몇 기독교계 신흥종교 교단들을 2016년 통합 교단이 사면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철회한 사건. 교단 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스펙트럼이 넓은 상황에서 교단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취합하지 않은 상태로 성급하게 사면을 진행하는 바람에 발생한 사태로 교단 내부나 타 교단, 그리고 사면 대상 교파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6.2. 광주 안디옥교회[63] 방역 조치 비협조[편집]

교인들이 IM선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원인이 되어 코로나에 감염되었음에도 검사를 거부하며 의료진과 문재인이 교회를 죽이려고 한다고 남탓으로 돌리기만 해 논란이 일고 있다. # 특히 한 교인이 '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쩌라고'라는 자세로 자기 때문에 코로나가 퍼지든 말든 배째라는 태도로 버티고 있다. 이후 1월 29일 안디옥 관련 확진자가 30명이나 나와 광주광역시의 총 일일 확진자가 54명으로 늘어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안디옥교회는 벌금형이 나왔음에도 대면예배를 강경하게 고집하였다. #

6.3. 장로회신학대학교 무지개기 사건[편집]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공식 채플 시간에 소위 '무지개 깃발'을 몸에 두른 채 예배를 드려 논란이 되었다. 채플이 끝난 직후에는 무지개색 깃발까지 든 채 단체사진을 촬영해 SNS에 게시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지지자는 신학대에 입학할 수 없다고 결의하였었고 또 헌법개정을 통해 동성애자가 교회 항존직과 임시직, 유급종사자가 될 수 없도록 하며 동성애와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성명도 발표했던 102회 총회의 입장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6.4.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편집]

교계 내 영향력이 매우 큰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이다. 해당항목참조

7. 파생 교단[편집]

분가한 순서 순으로 서술. 예장 합동이 분가한 이후로 별다른 분열의 역사가 없다는 관점도 있지만, 통합도 이런저런 이유로 꾸준히 목사들이 이탈하여 파생교단이 생기고 있는 중이다.[64]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평신도 최태용을 제명하여 탄생한 교단이다. 최태용은 일본 유학을 하면서 우치무라 칸조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실상 퀘이커의 분파로써 활동했으며, 당시 장로회를 비판하며 신정통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최태용은 복음교회를 창립하며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태용 목사도 무교회주의에 큰 한계를 느껴서 무교회주의를 폐기해버리고 민족주의로 신학 노선을 변경하여 그냥 한국 토착 교파가 되었다. 그래서 교세는 매우 작지만 엄연한 주류 교파이다. 최태용의 탈퇴 당시 오늘날의 수도권과 호남지역 교회에서 동조자들이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해당 교단 교세가 형성된 원인이며, 최태용의 신학적 이단성[65]을 정정한 지동식 박사 역시 호남에서 남장로회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믿은 인물이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중앙) : 1970년 여자목사 안수에 찬성하는 목사들이 백기환 목사를 필두로 탈퇴하여 세운 교단이다. 과거에는 여성목사 안수를 두고 통합과 대립한 적도 있으나 근본적인 신학 성향은 큰 차이가 없고, 1990년대 들어 통합측도 여성 목사 안수를 시작하면서 지금은 관계가 개선되고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상태. 산하에 온석대학원대학교를 두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피어선) : 1993년 피어선대학 동문들이 아서 T. 피어선 목사의 신학을 기리기 위해 탈퇴하여 세운 교단이다. 딱히 껄끄러운 문제로 갈라진게 아니다보니 예장 통합과 신학적 성향이 비슷하며 교류도 활발한 교단이다. 피어선대학은 평택대학교로 개칭한다.
  •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 : 1997년 장로회 헌법에 의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사 결정과정에 얽매이기 싫었던 자유교회 성향 목사들이 탈퇴하여 세운 독립교단이다. 원래 목사를 자체적으로 양성하지 않았던 연세대, 서울여대, 한남대, 전주대, 계명대, 김천대 등 예장 통합 소속 종합대학에 개설된 신학대학원과 인준하였다.[66]

8. 분열된 교단[편집]

각자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여 호헌총회임을 주장한 교단들이며 시간 순으로 정리.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본 문서의 고신 관련 단락 참조. 분열 이전 예장의 경남노회. 신사참배에 저항한 목회자들을 당시 예장 지도부가 퇴출시킴에 따라 신사참배 저항 목사들이 고신을 세웠다. [67] 그렇다보니 예장 고신 측에서는 고신 목사들을 주도적으로 퇴출한 예장 통합과 기장의 수뇌부에게 큰 원한과 증오를 품었다.[68] 예장 통합이 현재까지도 비판받고 있는 흑역사. 다만, 2016년 통합이 과거 신사참배 및 저항파 목회자들의 제명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서로 화해하였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본 문서의 기장 관련 단락 참조. 성서비평학을 수용한 김재준 목사와 그 제자들을 퇴출시켜서 파생된 교단이다. 후술할 예장 합동이 생겨나자 장로교 통합을 위해 기장과 통합을 시도하였고 기장의 온건파를 상당수 흡수한다. 2016년에 예장통합 총회는 김재준의 제명을 철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동년 10월에는 기장 총회 측에 이를 알렸다.#

8.1. 최종 분열 당시의 교단들[편집]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 WCC 가입에 반대한 박형룡 목사와 그 제자들이 탈퇴하여 파생한 교단이다. 이 때 먼저 갈라져 나간 예장 고신과 뜻을 같이하며 통합했으나 신학교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졌고 1963년 결국 결별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 김치선 목사[69] 가 광복 후 대한신학교가 박정희 정부에게 캠퍼스를 뺏겨서 폐교할 위기에 처하자 ICCC의 도움을 받고 새 캠퍼스를 마련하며 계약에 따라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며 탈퇴한다[70]. 이때 합동측과 통합측은 잠시 재연합을 위해 1968년까지 합동원칙에 합의하는 등 과도기에 있었는데, 대신측은 제3의 길을 간 교단이라 할 수 있다. 설립자와 학교, 해당 교단을 형성한 목회자들도 합동측과 분열 전 예장 출신들이었다. 대한신학교는 안양대학교로 개칭한다.
  • 중도파라 불리던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 계열 교단들: 이 교단들은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신측)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