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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 Nocturne #20 In C Sharp Minor, Bi 49 (야상곡,쇼팽)

카이로스3 2021. 9. 27. 13:40

Nocturne #20 In C Sharp Minor, Bi 49

 

39년밖에 살지 못했다.

평생토록 몸이 약했다.

스물일곱에 파혼당하고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다.

제 2의 모차르트라고 불리었고, 자신의 장례식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기 원했다.

 

 

음악교육을 받기도 전부터 누나 루트비카와 듀엣을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조금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정식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불과 1년 후 ‘폴로네이즈 g단조’를 작곡해서 바르샤바 신문에 실릴 정도의 신동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많이 허약했으며 이로 인해 유년시절의 많은 시간을 작은 마을 등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1

7살이 되던 해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했고 거기서 음악원 동기생이었던 메조 소프라노 콘스탄치아 글라코프스카를 만난다.

그녀를 위해 ‘피아노 협주곡 f단조’를 바쳤으나 그 10대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콘스탄치아는 얼마 후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어려서부터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풍부한 경험과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느껴왔던 쇼팽은콘스탄치아와 헤어진 후인 1930년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거의 1년이 걸려 도착한 파리에서 멘델스존, 리스트 등과 교재하며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하다가 1832년 파리 데뷔연주회를 갖는다.

음악계뿐만 아니라 사교계에서도 유명해지면서 델피나 포토카(Delfina Potocka) 백작부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와의 은밀한 열애설은 파리 사교계로 흘러나갔다.

그는 이미 결혼해버린 콘스탄치아에게 바쳤던 ’피아노 협주곡 f단조‘를 델피나에게 다시 헌정하기도 했으며, 그들은 쇼팽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연락을 하며 지냈다.

그녀를 위해 ‘강아지 왈츠‘를 작곡하기도 하지만, 이미 결혼한 상태였던 그녀와의 사랑은 1911년 페르디난트 호지에크 작 [쇼팽, 그의 생애와 작품]이 출판될 때 까지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며 단지 쇼팽이 사망하기 이튼 전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었다.

 

 

-델피나 포토카(Delfina Potocka) 백작부인-

 

 

다시 돌아가자면,

1835년, 25살의 쇼팽은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결혼을 약속했던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만나게 된다.

그 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내던 사이기는 하였으나 이번의 만남은 이성으로 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리아를 만나고 돌아간 쇼팽은 ‘이별의 왈츠’를 작곡해 마리아에게 바친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쇼팽은 이 시기에 특히 건강이 안 좋았는데 그칠 줄 모르는 기침과 각혈은 고향인 바르샤바에 중태라고 소문이 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마리아와 쇼팽의 사랑을 처음에는 인정했던 마리아의 어머니도 그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자 몸을 아끼고 건강에 특히 신경 쓸 것을 다짐받는 편지를 띄운다.

하지만 쇼팽은 자신의 건강을 조심하는 종류의 사람이 절대 아니었으며 그로인해 1837년 극심한 독감에 걸리고 만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병이 났으며 자기 자신을 이렇게 돌보지 않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판단, 약혼 취소를 통보하기에 이른다.

쇼팽과 마리아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났으며 그는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들을 묶어 ‘나의 고통’이라고 써놓았다.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

 

 

사실 마리아와 헤어지기 전 리스트에게 한 여성을 소개받았었다.

여인의 이름은 죠르주 상드(George Sand), 당대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인정한 유명한 작가였으며 자신의 의사표현을 서슴지 않는 성격에 남장을 하고 다니기도 하는 독특하고 적극적인 여성해방주의자였다.

그녀는 쇼팽을 보자마자 그의 음악적 재능과 부드러운 성격에 반해 사랑을 표현했으나 쇼팽은 죠르주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건강과 배신감에 따른 결정이라 하지만 어머니의 이런 결정에 반기를 들지 않고 자신을 떠나버린 마리아, 어찌보면 나약하다 할 수 있는 그녀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을까. 죠르주의 초대를 거절하며 멀리했던 쇼팽은 마리아와 헤어진 이듬해 그녀를 받아들였다.

워낙 거침없는 성격의 죠르주였기에 쇼팽 주위의 지인들은 “쇼팽이 마수에 걸려들었다.” “남자란 동물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그녀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사이는 꽤 좋은 편이었으며 특히 죠르주가 첫 희곡 ‘코지마’의 실패로 힘들어 할 때 쇼팽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거의 그녀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쇼팽과 이들은 스페인령이었던 마요르카섬에서 요양을 했는데 이들 남녀가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이 이들에게 집을 내주기를 거부하면서 옛 수사들이 쓰다 방치해 놓은 발데모사 수도원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였다.

르주는 정성과 사랑으로 쇼팽을 간호하였으나 바람이 많고 습한 이 버려진 집은 요양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장소였으며 그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죠르주 상드의 작품 ‘상처’ 중에서.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꽃을 더듬는 내 손 거두지 않는다.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죠르주 상드(George Sand)-

 


이로부터 1845년까지 이들은 바르셀로나, 마르세이유, 죠르주의 별장이 있던 노앙 등 스페인과 프랑스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지냈으며 그 중 죠르주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극진한 보호와 간호를 받으며 살던 3년간은 그가 가장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작곡된 곡이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이다.

하지만 행복했던 그들의 시간은 쥬르주의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어 그들의 사이를 혐오하기 시작하면서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는데 모자관계의 회복을 위해 애쓰던 쇼팽의 노력은 헛된 추억으로 남긴 채 1845년 9년간의 사랑은 죠르쥬의 이별 편지로 막을 내린다.

좋게 말해 부드러운 성격이고 어찌보면 우유부단한 쇼팽과 자아가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죠르주의 관계는 이렇게 죠르주로 인해 시작되고 죠르주로 인해 끝이 났다.

 

 

-프랑스 화가 Eugene Delacroix(1798-1863)이 그린 죠르주 상드와 쇼팽-

지금은 둘의 그림이 반으로 나뉘어져

죠르주쪽은 코펜하겐 박물관에, 쇼팽쪽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죠르주와 헤어진 것이 1845년,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였으나 그의 결핵과 폐병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 여행을 계속했던 쇼팽은 1948년 런던에서 제니 린드(Jenny Lind)를 만난다.

그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감동시킨 소프라노로서 일명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렸던 최고의 성악가였으며 안데르센의 작품 ‘나이팅게일’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베르디가 자신의 오페라 I Masnadieri의 초연에 1847년 제니를 주인공으로 맡겼을 정도로 당대에 유명하던 그녀는 쇼팽을 만나고 나서 그와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사랑에 빠졌으나 2년 후 쇼팽은 사망하게 되고,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오페라를 하지 않았다.

 

 

-제니 린드(Jenny Lind)-

 

쇼팽은 자신의 심장을 20세에 떠난 고향 바르샤바에 묻어달라고, 자신의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해달라고 유서에 남겼고, 그의 누나 루트비카는 1949년 10월 30일 모차르트 레퀴엠이 흐르고 있는 마들렌 성당을 뒤로 한 채, 그의 심장과 죠르주 상드의 편지들을 가지고 폴란드로 향했다.

 

 

말년의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