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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adows of Heaven

카이로스3 2015. 1. 1. 22:19

 

 

 

고대 그리스 음악과 그레고리안 성가

 

음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독일의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는 “음악은 노래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럴 듯하다. 말을 하게 되고 흥얼흥얼 노래를 하게 되면서 소리에 눈을 뜨고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면서 화음에 점차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음악(Music)의 어원은 그리스어 무시케(Musike)다. 신들의 우두머리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 무사(Musa)가 관장하는 기예가 무시케다. 이 무사를 영어식으로 하면 뮤즈(Muse)가 된다. 뮤즈라고 하니까 많이 들어본 말이다.


음악의 어원 ‘Music’은 그리스어 무시케 ‘Musike’에서 왔다

무사, 즉 뮤즈는 모두 9명이었는데 로마 시대 후기에 업무 분장이 이루어졌다. 즉 칼리오페(Calliope)는 서사시, 우라니아(Urania)는 천문, 폴리힘니아(Polyhymnia)는 찬가를 담당했다. 플루트나 피리를 든 에우테르페(Euterpe)는 주로 서정시를 노래했고,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는 합창과 무용을, 에라토(Erato)는 리라를 들고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시를 노래했다. 멜포메네(Melpomene)는 비극을, 탈레이아(Thaleia)는 희극과 전원시를 담당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도 빼놓을 수 없다. 제우스가 사랑한 아들 아폴론은 빛과 진리, 음악과 시 등 좋은 것은 다 자기가 맡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아폴론과 무사이(무사의 복수형)


아폴론은 키타라(kithara, 발음에서 알 수 있듯 기타의 어원이다)라고 하는 7현악기(나중에는 11현까지 늘어났다)를 연주했는데, 이 악기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음을 연주해서 인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반면 술과 춤의 신 디오니소스의 하인 사티로스는 아울로스(aulos)라고 하는 오보에와 비슷한 관악기를 잘 불었다. 아울로스는 위험한 악기로 취급받았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정서상 좋지 않고 도덕을 파괴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아폴론에 가까울까 디오니소스에 가까울까? 철학자 니체는 음악은 가장 적합한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음악은 지속이며 움직임이며 변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군중을 열광시켜 하나의 혼 안에 녹여낼 수 있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이란 얘기다.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이다.

고대 그리스에도 음악 콩쿠르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젊은이들은 튼튼한 체력과 섬세한 감성을 겸비하는 것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삼았다. 고대 그리스 젊은이들의 ‘스펙’은 어느 정도였을까? 철학자 플라톤은 “직접 소형 키타라인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토익 900점도 학점 4.0도 아니지만 노래 잘 하고 기타도 잘 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고대 그리스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스에서 음악은 성인으로 성장할 때 감각이나 사고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반드시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키타라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을 그린 BC50~40년경 로마 시대 프레스코화

또한 당시에는 키타라의 반주로 노래하는 기술을 다투는 경연대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2000~3000년 전에 열린 콩쿠르인 셈이다. 경연대회는 키타라 연주와 노래뿐만 아니라 무용과 권투가 추가되고 합창과 비극이 더해져 점차 대규모가 되었다. 당시 합창단은 아마추어 시민으로 구성되어 자신이 속한 폴리스의 명예를 위한 스포츠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우수한 예술가를 스카우트하고 노래 형식이나 악기 연주 스타일을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 그리스의 음악은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음악을 중시했다. 플라톤은 음악을 교육적인 도구로 보았다. 그는 예술을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실용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이 그것이다. 군가나 국가, 응원가나 교가 등 실용예술은 시민생활을 결속시켜주는 이상 국가에 알맞은 것이며 단지 예술을 위한 음악은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예술 가운데 모방성이 가장 강한 예술이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언뜻 회화, 조각과 같은 미술이 더 모방성이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표현적인 예술이며 인간의 감성을 가장 잘 구상화한 것이란 말이다. 더 자세히 말해 예술가가 느끼고 상상한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타인의 마음에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이 음악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2대 과목은 스포츠와 음악이었다. 지금은 ‘언어영역’에 속하는 문학이나 문법도 당시엔 음악에 속해 있었다. 음악에서 문법과 기타 교과를 구분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음악과 문장(읽기와 쓰기), 체육, 그림 등 네 과목을 기본교과로 내세웠다. 고대 그리스에서 음악은 꽤 중요한 과목이었던 것이다.


교회 음악의 중요성과 성가의 춘추전국 시대

석기시대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동굴에서 노래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 동굴의 존재는 점차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4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서양 중세 시기는 정치와 문화에 있어 강력한 기독교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유럽 각지에 분포한 유명한 교회 첨탑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위엄으로 종교가 지배한 중세의 음악사는 교회 의식과 결부된 성가로부터 시작된다. 교회 의식에서 노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성가를 편찬하고 있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 라틴어로 노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는 ‘솔렘 생 피에르 수도원’ 수사들의 음반을 비롯해 CD로도 다수 출반돼 있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런 장식을 모두 뗀 듯, 동일한 멜로디를 다함께 일제히 노래하는 단순한 울림은 도시의 스트레스, 인간을 마모시키는 그 홍수 속에서 점점 메말라 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러면 이 중요한 그레고리오 성가의 탄생 과정과 배경을 한번 살펴보자.

유럽 역사에서 중세는 대략 395년경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출발점은 유럽 내의 지역과 요인들에 따라 13, 14, 15세기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곤 한다. 그렇다면 395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395년경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한다. 동서 로마의 분열은 동로마와 서로마가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 통치라는 형태로 이미 실질적으로 나뉘어 가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이때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해서 타민족의 침입과 이동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경제와 정치는 혼돈을 거듭했다. 일종의 암흑시대라 할 수 있었고 정보는 교류되지 않고 정체 되었다. 결국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후 교회가 분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각지의 교회는 각기 독자적인 방향으로 제 갈 길을 갔다. 서로마는 로마 주교가 교황으로 중심이 되고, 동로마는 황제 직속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동서 교회로 나뉜 것이다.


중세가 시작되던 무렵 유럽의 교회음악을 보면 고대 유대교 성가의 영향을 받아 지방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시리아에서는 시리아 성가, 이집트에서는 콥트 성가(콥트는 이집트의 기독교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아비시니아 성가(아비시니아는 흑인이라는 뜻), 동로마의 비잔티움 성가(여기서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가 나왔다) 등 각 지방에서 고유의 성가가 발전하였다. 서유럽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스페인의 모사라베 성가(모사라베는 ‘아라비아화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이후 이슬람교 통치 아래 있던 그곳 그리스도교인들이 무어인 치하에서 사용했던 예배를 일컫는다), 프랑스의 갈리아 성가(갈리아는 닭이란 뜻으로 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찬가, 로마의 로마 성가 등이 나타났다. 결국 이 당시 교회 의식과 성가에는 서쪽의 로마식, 밀라노식, 스페인식 스타일과 동쪽의 비잔티움식 등 여러 스타일이 혼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0년 뒤 이러한 각지의 성가들을 통일한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성가를 통일하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수도사들로부터 사랑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재위)가 영감을 받고 만들었고, 오랫동안 그가 편찬하고 체계화해서 그의 이름도 붙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안 성가를 교황 그레고리오 1세 혼자서 다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이후 많은 교황들이 편찬에 관여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레고리오 1세 이후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창작이라기보다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 로마와 갈리아의 성가를 통합 편찬했다고 후대의 학자들은 보고 있다. 편찬의 실질적인 중심인물은 그레고리오 1세보다 100년 뒤에 등장하는 그레고리오 2세(715~731 재위)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고 있는 가톨릭 수도사들


그레고리안 성가가 불린 교회 의식을 보면 식을 집행하는 사제와 그를 돕는 복사,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칸토르(cantor)라 불린 선창자가 있었다. 이들과 교회에 모인 신도들은 노래와 더불어 의식을 행했다. 성가대가 거기에 추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신도들은 칸토르나 성가대의 노래, 혹은 사제와 복사의 말에 노래로 응답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서방 교회의 각 지역 고유의 성가를 정리해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인 성가로서 로마 전례 양식의 미사나 수도원의 시간전례의 고유한 노래로 채택되었다. 그럼 미사는 무엇이고 시간전례는 무엇일까. 그레고리안 성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가톨릭 교회의 전례 형식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전례의 텍스트가 그레고리안 성가이기 때문이다. 훗날 등장하는 미사곡과 레퀴엠 등에도 가톨릭 전례의 부분이 나오기 때문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쓰이는 가톨릭 전례를 알아보자

가톨릭의 전례 형태는 시간전례(Officium, 전에는 ‘성무일도’라고 하였다)와 미사(Missa)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간전례는 수도원에서 하루 8번의 시간에 정해진 순서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 정해진 시간은 다음과 같다. 해 뜨기 전 마틴스(Matins), 해 뜰 때 라우드스(Lauds), 아침 6시 프리메(Prime), 아침 9시 테르체(Terce), 정오 섹스트(Sext), 오후 3시 노네스(Nones), 해질 때 베스퍼스(Vespers, 몬테베르디나 클래식 곡 중에서 ‘저녁기도’로 번역되곤 한다), 잠자기 전 콤플리네(Compline, 잠자기 전)가 그것이다. 미사는 가톨릭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로 그 이름은 미사가 끝날 때 사제가 말하는 ‘가시오, 집회가 끝났소’(Ite, missa est)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한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랜 시간에 걸쳐 확립된 미사 의식은 안티폰(교송, 두 개의 합창에 의한 응답적 창법)으로 부르는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사제가 성당에 들어설 때 부르는 ‘입당송’)으로 시작해서 키리에(Kyrie eleison, ‘자비송’. 첫 소절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로 시작된다), 글로리아(Gloria, ‘대영광송’) 등으로 이어진다. 복음서의 낭독이 끝나면 독창자와 회중이 레스폰소리아(선창자에 대응한 ‘알렐루야’ ‘아멘’ 등 짧은 구)로 부르는 그라두알레(Graduale, ‘화답송’)가 이어지고, 사제의 강론 후에 회중이 크레도(Credo,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를 바침으로써 말씀의 전례가 끝난다.*


성찬의 전례는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 ‘봉헌송’. 봉헌물을 제단에 바칠 때 부르는 노래)으로 시작되어 기도 후에 회중의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와 베네딕투스(Benedictus, ‘찬양할지어다’)가 이어지고 빵과 포도주를 사제가 바치는 동안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 양’이란 뜻)를 부르게 된다. 이제 거의 끝났다. 성찬식 후 코무니오(‘영성체송’, ‘성체를 주다’는 뜻)와 파견 성가로 끝을 맺는다.*


중세 시대에 제작된 그레고리안 성가의 화려한 악보

그레고리안 성가는 천 년이 훌쩍 넘어 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현지어를 사용하는 전례가 용인된데다가 그레고리안 성가를 반드시 불러야 할 의무도 없어져서 현재는 전례음악으로서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점차 각국 언어의 성가에 밀려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전례에 가장 합당한 음악 형태는 그레고리안 성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심플한 것이 미덕이던 성가도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예술적으로도 풍부한 정보를 가지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성가를 담당하는 이도 일반 아마추어 대중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가수들로 대체되었다. 교회나 수도원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성가를 만들고자 하는 의욕이 넘쳤다. 성가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지만 점차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다. 복잡한 양상을 띤 성가가 늘어나면서 그 전부를 기억해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악보에 음표를 적는 기보법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여기서 잠깐! 그레고리안 성가를 포함한 교회음악을 정리해보자. 첫째, 주선율이 한 성부에서만 나오는 단성음악이고, 둘째, 무반주(아 카펠라)로 노래했다. 셋째, 남성들(사제 혹은 보이소프라노)만의 노래이고, 넷째 라틴어로 노래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박자와 소절 없이 자유로운 리듬으로 노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한 음악이 신의 음악으로 넘어가고 있던 중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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