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ic Lounge(모든 장르)

사의 찬미-윤심덕[1926]

카이로스3 2020. 11. 28. 10:48

윤심덕

다른 표기 언어 尹心悳

툴바 메뉴

요약 테이블출생사망국적본관호

1897, 평양
1926. 8. 4, 일본 겐카이나다[玄海灘]
한국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수선(水仙)

요약 <사의 찬미>로 유명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본관은 파평, 호는 수선.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며, 자라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21년 귀국하여 순회공연을 하던 도중 극작가 김우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26년 8월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연락선에 탑승한 두 사람은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언론에서는 투신이라 보도했지만 사고사이거나 타살의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이들의 정사 사건은 영화 <윤심덕>과 연극 <사의 찬미> 등으로 극화되었다.

목차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주요 활동
  4. 영향과 평가

개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소프라노 가수. 본관은 파평. 호는 수선(水仙). 성악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소프라노 가수였으나 열악한 당시 상황에서 고난을 겪다가 연인 김우진과의 투신 자살로 유명해졌다. 윤심덕이 죽기 직전 녹음한 <사의 찬미>가 포함된 음반은 1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정사 사건은 이후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연되기도 했다.

초기 생애

1897년 7월 25일 평양에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형제들은 모두 신식교육을 받았으며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윤심덕은 평양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교사가 되기 위해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년 간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한 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주요 활동

1921년 일시 귀국하여 동우회(同友會)에서 주최한 국내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당시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1년 간 근무한 뒤, 1923년 귀국했다. 1923년 귀국 후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첫 독창회를 열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의 공연이었다.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해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이름을 떨쳤고, 1925년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 무대에도 섰으나 연기력이 부족해 그만두었다.

하지만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게 되자, 윤심덕은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윤심덕은 본격적인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당시 조선의 환경에서는 그의 꿈을 펼치기에는 매우 열악했다. 1926년 여동생 성진의 미국유학길을 배웅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했다. 이후 8월 3일 급작스런 귀국을 결정하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연락선에 탑승한 그는 4일 새벽 김우진과 함께 배에서 사라졌는데, 많은 신문에서 이들이 배에서 투신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바노비치 작곡인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자신이 직접 노랫말을 쓴 〈사(死)의 찬미>가 이 레코드에 들어 있는데, 이 음반은 그녀가 사라진 뒤 유명해져서 10만 장이 넘게 판매되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는 신극운동 때의 유명한 연애사건으로, 박승희는 이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사(死)의 승리〉를 토월회 재기공연 때 발표하기도 했다.

영향과 평가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에 대해서,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에서 이들의 투신을 사실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밝혀진 것은 이 두 사람이 같은 배에 탔으며, 대마도를 지날 때 선실의 문이 열려 있었고, 가방과 지갑 등 유류품이 남아 있는 채로 사람들만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도 없어서 이들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자살을 가장하고 도피해서 살고 있다는 식의 풍문도 있고, 자살이 아닌 사고사일 가능성뿐 아니라 타살설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서사를 담고 있는 이들의 정사 사건은 이후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으로 극화되었다. 1969년에는 안현철 감독이 영화 <윤심덕>을, 1991년에는 김호선 감독이 영화 <사의 찬미>를 제작했고, 1988년에는 윤대성이 희곡을 쓴 연극 <사의 찬미>가 공연되었으며, 1990년, 2005년, 2015년에는 뮤지컬로 바뀌어 공연되기도 했다.

윤심덕

1897-1926. 성악가 배우.

ⓒ 중앙일보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