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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영원 그리고 역사

카이로스3 2016. 9. 9. 15:52

 

 

시간과 영원 그리고 역사

 

- 장신대 컴퓨터 선교회 자료에서 발췌 -

 

< 시간과 영원 >

사람은 아침과 저녁, 젊음과 늙음 사이에 어떤 지배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옛날에도 있고, 지금도 있는 것, 즉 중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지역적 제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조건에 의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학은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인데, 2500여 년 전에 서양철학이 시작되었다.(탈레스, 밀레토스섬 출생, 에게해를 중심으로 철학 발전, 처음으로 자연계를 분석하였음,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을 보고 물질세계에 있어서의 기본요소를 물과 불로 규정하고 ‘atom’의 개념을 생각해내었다.) 철학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사람은 두 가지 범주에 지배되는 것을 알았다. 시간과 공간, 사람은 이 두 가지를 결코 극복하지 못하며 철학은 이 두 가지를 극복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다.

 


성경에 조직적으로 시간에 대해 설명한 곳은 없으나, ‘태초에’ 로 시작하고 있다. 창조 전에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도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간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다 보니 ‘태초에’라고 하지 않았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시간의 정체는 과학적으로 규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 시간의 문제의 신학화 >

아우구스티누스는 Confession에서 “과거가 현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인지, 현재가 과거를 추방하는 것인지, 미래가 현재를 추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가 묻지 않을 때엔 아는 줄 알았는데, 누가 물으니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시간은 현재 뿐이다. 과거로서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그 이후에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설명을 시도하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론까지 밖에는 오지 못하였다. 우주과학자들의 시간 개념은 신학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의 속도보다 빠른 것을 다룰 때에는 인간의 시간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영원도 마찬가지이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시간을 말할 수 없다.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있는 것은 사실이나, 설명은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확연한 사실이다. 하나님을 ‘영원자’ 라고 말할 때에는 의미개념을 정확히 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 개념을 넘어서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시간의 개념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원과 시간의 관계는? ‘영원은 시간이 끝나는 곳부터이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시간과 영원이 현재에 있어서는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떤 이는 시간 안에 영원이 존재한다. ‘영원이 시간을 포함한다’ 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을 다른 신앙의 고백과 같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실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20세기 신학자들 중 다수가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시간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의 4가지 국면 중〔이성(로고스), 감성(파토스), 도덕성(에토스), 영성(뮤토스)〕‘뮤토스’의 차원이 있는데, 그 체험은 기적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장로교는 전통적으로 이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장로교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가 1932년 현풍에서 턱 떨어진 사람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사도시대까지 국한시켰던 이적기사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적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어지럽다.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이적기사를 부인할 수는 없다. 성령의 역사는 일상적, 비일상적인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비일상적인 방법의 역사가 바로 이적기사이다. 이런 성령의 역사(work)가 뮤토스의 역사(history)이다. 미국의 장로교나 한국의 장로교 모두 뮤토스의 실체를 부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부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시각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넓은 차원에서는 이적기사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1900년 미국의 한 여학생이 중국어 방언을 받은 것을 계기로 Pentecost Movement(오순절 운동)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영역은 아주 제한되었는데, 가끔 초월적인 역사가 접근해 온다. 그래서 초월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적과 기사이다. 로고스, 파토스 등은 공간적인 개념이지만, 뮤토스는 시간의 개념이다. 신앙은 이 4가지의 개념이 어우러진 4차원적인 것이라야 한다.

 


신앙인의 현 역사(history)는 영원이 시간 안에 잠입해 있는 시간과 영원의 역사이다. 우리는 종말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심판이라는 것은 영원의 개념이다. 영원의 使者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사건으로 인해 시간 안에 영원이 들어왔으며, 우리는 시간과 영원을 공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일반인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삶이다.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는데, 크로노스는 연대적 시간 개념이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의 개념이다. 2000년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크로노스의 방법으로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죽는다는 것도 모두 크로노스의 시간적 방법의 개념이다. 우리의 죽음과 결혼 등은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다고 해서 영원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깎아내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자연주의 신학의 일 단면이기도 한다.(자연주의 신학: 18-9세기 영국에서 자연법이 성행함에 따라 모든 자연계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만한 것이 있다는 주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의 양심이 그 중 하나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역할이 축소되게 된다. 칼빈은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계와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편의 주장으로는 형상이 파괴되긴 하지만 파편은 남아있다고 하는 주장이 일어났다. )

 

< 역사신학 >

초기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으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종말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있었으나, 역사적 고찰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역사철학이 발전함에 따라 20세기에 들어와 역사에 관한 신학적 고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라인홀드 니버’등이 유명한 학자이다. 바르트 등은 종말을 전제로 한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 자신의 전문 논지에서 “초림과 재림사이에 사는 인간” 에 관하여 쓰기도 하였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이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은 공중에 뜨는 것이 될 것이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지상의 모든 역사와 삶 안에서의 행해야 할 것들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를 떠나서는 신앙이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가 불안하고 절망적이므로 박해를 받던 신자들이 역사에 관한 생각을 단념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미래지향의 말세 지향적 신앙이 박해 가운데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 일제시대에 이런 사상이 팽배하였으며, 여기에 샤머니즘적인 독특한 신앙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의 신앙은 문화, 사회, 역사와 단절된 신앙이었다. 일제 때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은 그만큼 다양한 신앙의 자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한 환경 때문에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묶어서 지도할 지도자가 없었다. 한국교회의 과제에 통합이 있다.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는 신앙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 예수님은 두 방향 -수직, 수평- 을 가르치셨다.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수평적인 것을 가르치면서 사셨다. 그러나 수직이 없이는 수평이라는 개념이 생길 수는 없다. 사회와 문화가 중요하다.(한국교회의 토착화 문제. 장로교는 기독교 토착화에 대해 무관심하였음. )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자라나려면 한국 땅의 복음의 뿌리가 생겨나야 한다.

 


신학의 경우 유럽의 사회에 관한 책만 읽다가 한국의 실정에 맞게 생각하려면 여간 어렵지 않다. 내가 사는 곳에서의 사회의 특징과 복음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보면 2차대전이후 한국교회가 대중 속으로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운동권에서는 한국교회를 부르조아 교회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한국교회처럼 proportion이 다양한 교회가 없다.(헌금에 꼬깃꼬깃한 지폐가 많은 것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의 헌금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사의 조건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이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강점이 있다. )

기독교적인 역사의 창조가 필요하다. 역사자체를 기독교화 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실체 >

시간을 떠나서 살 수는 없지만 시간과 무관한 일들이 일어나며 시간과 무관한 존재를 경험한다. 역사 안에서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이 모든 일들이 무궤도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역사가 망하지 아니하고 계속 유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혼란은 파괴를 이끌어 오게 되어있는데, 역사는 망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전체적으로 발전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 낙관주의자도 있다. 부분적으로 혼란하나 역사는 통일된 부분으로 달리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아전개라고 보고 있다. 절대정신이 무엇인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이며, 헬라의 입장에서는 로고스, 도교의 입장에서는 도가 절대정신이다. 절대정신의 자아전개이므로 통일적인 방향전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대정신을 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러한 존재가 있다면 일부의 학자는 자연법이 그것이라고 한다. 동양 종교에서 이것을 명확히 일컫는 말이 없지만,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이라고 한다. 인과응보가 자연법이다.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자연법을 벗어나서는 살수 없다. 지구상의 삼라만상이 무질서한 듯이 보이지만, 그것들은 모든 존재를 생성, 소멸케 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연법을 누가 존재하게 하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왜 이것이 이렇게 강력하게 피조물을 지배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과 사건과 자연이 역사의 실체인데 이것들이 개별적으로 종합적으로 발전해나가지만, 이것들만으로는 역사의 비밀을 이해할 수 없다.

 


이 3가지 질서와 관계없이 이것을 연계시키는 제 4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 이것들을 유목적적 방향으로 이끄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라고 한다. 밤 하늘의 별과 나를 도덕적으로 이끄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신의 존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하였다.

 


< 역사의 주인 >

자연법과 우연법에 의해서 역사는 움직인다고 학자들은 생각하였다. 자연법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우연법은 자연법에 따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경우를 말한다. 상호연관성이 없는 사건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원자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것들은 필연과 우연에 의해 움직인다. 세계가 필연으로만 움직인다면 인정과 사랑이 없는 맹목적 필연의 세계일 것이며, 우연의 법칙으로 세상이 움직여진다면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의 세계일 것이다.

 


우연과 자연법을 잘 기능적으로 조합하는 제3의 법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역사지배의 주체이다. 동서양의 종교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말한 것들을 요약해보자. 나선형적 역사관으로 보면 역사에는 축이 있다. 역사는 우연으로만 또는 자연법으로만 무궤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의 중심원리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섭리이다. 직간접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역사의 축인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

 


학살과 전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양의 정신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종교개혁 이후로 서양의 정신사는 하나님의 영역을 차츰차츰 잠식해 갔으며 니체에 와서는 신을 죽이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타자를 믿을 필요 없이 우리의 신을 믿자는 주의가 생겨났다. 이런 믿음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서서 대전이 터져 많은 살상이 일어났다.

 

 

< 역사의 길이 >

불교에서는 윤회의 개념을 들어 시간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인도 사람들은 ‘겁’이라는 시간을 들어 종말이 없음을 표현했다. 헤겔도 시작은 있으나 종말은 없다고 하였다. 일부에서는 종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가치판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욥기의 마지막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모든 일에 대한 가치판단이 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미신적인 종말론을 주장하는 종교가 있기도 하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차원은 아니다. 유대교의 종말론은 메시야의 도래가 세상의 종말인데 비해, 기독교의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신구약은 만물의 시작과 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종점으로 역사는 끝이 나며, 그 이후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메시야 왕국이 있다.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 시간 자체는 길이가 없으나 모든 만물에 시간을 부여하여 준다.

 


역사에도 종말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다. 신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이므로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재림의 시기에 대해 점치는 일은 한국의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직통계시를 주는 일이 없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바르트는 ‘쉴라이에르 마허’ 를 비판하기를 기독교신앙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없이는 신앙이 이루어질 수 없다. 기도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계시를 받곤 하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것은 계시일수 없다. 역사에 관하여 몰트만은 “하나님의 간접적 자아개시” 라고 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역사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이루어져야 한다.